2025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 한국단편경쟁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램 노트
누군가의 꿈을 만들어내는 오퍼레이터가 있다면?
그러면 죽음을 앞두고 있는 스무 살 현진의 마지막 꿈은 어떠해야 할까?
현진의 꿈은 온통 한 사람의 이름으로 도배된 아련한 청춘의 영화다.
미래적 상상에서 시작하여 가장 고전적인 감정의 형태에 다가가는 SF 판타지. (강소원)
옷과 신발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이 기억뿐일 때, 온 힘을 다해 장면을 만들어야만 한다.
우리에게 남은 것이 기억뿐일 때, 온 힘을 다해 장면을 만들어야만 한다.
매일 밤 누군가의 머릿속 세계에서 만들어지고, 상영되고 또 잊혀지는 꿈들에 대해 생각한다. 관객도 한 사람. 주인공도 한 사람. 단 한 사람을 위한 작품을 매일매일 만들어내는 내면의 존재들에 대해 생각한다. 꿈 속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타인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들은 결국 한 사람이 만나고 기억하고 욕망하는 모든 무의식의 실현이다. 꿈 속 세계는 우리가 진짜 세계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러나 현실의 그들과는 조금 다른 '분인'들이 살아가는 내면의 세계이다.
한 편의 꿈이 우리를 지나쳐 가는 과정에 대해 상상한다. 내면의 도서관에는 그의 기억과 상상들이 정리되어 있고, 마치 미술관처럼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이 박제되어 있다. 다양한 소품과 공간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고, 오래된 기억과 잊고 싶은 상처, 실없는 상상과 묻어둔 욕망들을 재료로 장면을 만들어 간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이 숨을 거둔다. 하나의 세계가 사라진다.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는 <나란 무엇인가>를 통해 인간의 기본 단위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한 사람이 사라진다는 건, 그의 내면에 존재하던 내가 죽은 것과 같다. 한 사람이 사라진다는 건, 그를 둘러싼 한 겹의 세계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죽을 때, 그 사람의 주변, 더 나아가 그 주변으로 무한히 뻗어가는 분인끼리의 연결 또한 파괴"된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파괴되는 것은 그의 기억과 감각과 감정, 그 수많은 세계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꿈은 한 사람의 세계이다. 이 이야기는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임과 동시에 그의 꿈을 만들어 나가는 주변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언제나 배경이자 조연, 시뮬라크르로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이들의 이야기면서, 거스를 수 없지만 있는 힘을 다해 건네고 싶은 마지막 인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프로덕션 노트
1. 공간과 톤 앤 매너
<사라지는 세계> 속 모든 공간은 현진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가상의 세계다. 현진의 기억 속 장면들이 디오라마처럼 곳곳에 펼쳐져 있고, 기억에서 잊혀진 사물과 잡동사니들이 쌓인 창고가 있으며, 꿈의 장면을 만드는 것을 총팔하는 스튜디오가 있다. 스튜디오엔 현진에 대한 화이트보드와 상황을 살피기 위한 모니터, 여러 장비와 무대 세트, 소품이 준비되어 있다.
<사라지는 세계>는 한 사람의 머릿속 세계를 현실화하는 디제시스를 목표로 했다. 한 사람의 꿈 속 세계, 머릿속 공간이라는 영화의 핵심 컨셉을 대사 없이도 설명할 수 있는 프로덕션 디자인과 로케이션 선택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시흥시에 있는 한 수자원센터(를 리모델링한 문화공간)에 답사를 진행했고, 공간을 둘러보는 순간 미리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원형의 푸른 색 돔과 구조물들, 나선형 계단, 농축조와 지하실. 그리고 공간을 보고 나니 써지지 않던 시나리오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머릿속에만 그리던 여러 이미지들을 미술감독을 비롯한 모든 팀원들이 함께 구현해나갔다.
단순하게 배경을 스크린으로 처리하거나, 그래픽으로 구현된 가상 공간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이지만 분명히 현실에 존재하는 공간(하수 처리시설)과 소품들을 재료 삼아 시각화하고자 했다. 특히 삶과 기억이 더해질수록 낡고 손상되고 거칠어진 시간의 두께를 담고 있는 공간이어야 했다.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인 ‘드림 코어’의 요소와, 여러 전자기기와 디지털 화면을 통해 비현실적인 환상의 세계를 표현하는 ‘카세트 퓨처리즘’이 본 영화의 중요한 시각적 테마가 되었다.
2. 데이터베이스로서의 인간
이 영화 속 오퍼레이터'들은 모두 현실의 인물들이 아니다. 이들은 모두 현진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며, 꿈 속에만 등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현진에 대해 생각하고, 저마다의 기억과 감정을 갖고,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채 살아간다. 현진의 죽음을 알게 된 이후, 이들은 현실에서 현진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 각자의 원본 인물들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을 가지는 한편,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온전히 수행하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한 사람은 기억과 경험의 총체, ‘데이터베이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여러 기억의 편린들이 스쳐가는 거대한 극장, 버려진 기억의 조각과 오브제들이 녹슬어가는 창고, 그 때 그 때 옷을 갈아입고 주인공 앞에 다시 나타나는 무의식 속 ‘분인’들. 한 사람이라는 세계는 도서관이나 미술관의 아카이브와 같아서, 그러한 누군가가 사라진다는 것은 곧 한 세계의 상실,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의 상실과 같은 일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별과 슬픔을 두고, "잊지 않겠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기억하겠다"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거대한 상실과 비극 앞에 완전히 무너지기도 하고, 힘을 잃기도 하고, 회의감에 빠지기도 하지만. 기어이 우리가 기억하고 추억하고 사랑하는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놓는 영화가 되기를 바란다.
3. 애도와 이별
영화의 중요한 화두는 결국 ‘애도’이다. 심리치료전문가 정혜신 박사는 ‘함께 듣고 울고 웃는 과정이 곧 애도’라고 말한다. 결국 오퍼레이터들이 준비하는 마지막 주마등과도 같은 꿈은 그 과정이다. 영화 내에서 현진의 사인은 정확하게 언급되지 않지만, 관객이 저마다 떠올릴 수 있는 사건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동안 ‘세월호 세대’라는 나의 정체성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좁은 의미에서는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세월호에서의 단원고 학생들과 비슷한 연령대의 세대를 뜻하는 말이지만, 넓게는 이 사회의 수많은 참사를 목격하고, 애도와 안전, 공동체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는 모든 이들이 ‘세월호 세대’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무엇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여전히 나는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보자고 생각하는 단계에 있다. 사회적 참사가 우리 사회에 남긴 거대한 파문, 시스템과 정치의 문제, 공동체에 대한 질문은 내가 품기에는 아직 (물론 언젠가는 그 질문까지 닿아야겠지만) 역량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한 사람’에 대해서는 쓸 수도 있겠다고, 만들어 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작품을 준비했다. 옷과 신발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 대해, 남겨진 이들의 숙제에 대해 저마다의 마음 속에 작게나마 울림이 있는 작품을 완성하고자 했다.